ARPG라는 장르는 이상하다. 전투는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어떤 게임은 정신없이 손이 즐겁고, 어떤 게임은 절망적으로 정서를 깎아먹는다. 그 세계는 대체로 잔혹하고, 세계관은 끝났으며, 몬스터는 무한히 리젠된다.
파괴와 조립의 반복을 통해 세계를 살아가는 자의 감각. 이 장르가 제공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그 안에서 플레이어가 유일하게 기획할 수 있는 것은 ‘빌드’라는 구조물이다. 몬스터를 무수히 죽이고, 아이템을 파밍하고, 다시 돌아가 전투를 반복하는 이 장르의 핵심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그 반복 속에서 자기 서사를 설계해나가는 힘에 있다.
개인적으로 내가 플레이한 여섯 개의 게임이 있다. 『디아블로2』, 『디아블로3』, 『디아블로4』, 『Path of Exile (PoE)』, 『PoE2』, 그리고 『토치라이트』. 이들은 ARPG라는 구조를 저마다의 방향으로 풀어냈고, 『Last Epoch』는 그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감각을 조용히 선언한다.
『디아블로2』는 ARPG의 신화다. 이 게임의 세계는 절망적이었고, 조작은 느렸으며, 죽으면 진짜로 불편했다. 그러나 그 불편함 안에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앞을 나아가는 전사적 존재가 있었다. 룬 조합, 수동 스탯 분배, 무자비한 하드코어 모드. 플레이어는 이 세계를 통과하는 수행자였고, 아이템은 구원이자 형벌이었다. 『디아블로3』는 정반대였다. 시스템은 매끄럽고, 화려하며, 모든 것이 즉각적 보상으로 설계되어 있다. 스킬은 자유롭게 리셋할 수 있고, 트리도 단순해졌다. 비판도 많았지만, 이 게임은 ARPG가 손맛의 장르임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친구와 함께할 때 가장 즐거운 게임이기도 하다. 적을 쓸어버리는 ‘연주자’로서의 쾌락. 『디아블로4』는 미묘하다. 기술적으로는 발전했고, 시각적으로는 아름다우며, 내러티브도 섬세하다. 그러나 그 모든 정교함 속에서 플레이어는 이상할 정도로 ‘주체가 되지 못한다.’ 오픈월드는 있지만 동기 부여는 약하고, 스킬 트리는 있지만 몰입의 깊이는 얕다. 아름다우나 텅 빈 게임. 설계는 되어 있으나, 설계된 대로 따라갈 뿐이라는 느낌. 『Path of Exile』은 시스템의 괴물이다. 거대한 패시브 트리, 젬 시스템, 링크, 크래프팅, 다양한 오브, 맵핑, 이것저것 파밍할 수단, 리그마다 바뀌는 메타.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빌드를 설계하는 디자이너이자, 동시에 고통의 장치를 통과하는 실험체다. 처음엔 그 복잡성에 매료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고통을 넘은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로 전환된다. 그 감각은 UFC 같고, 때론 고문 같다. 『PoE2』는 그 후속이자 개선형이다. 스킬 젬 시스템을 통합하고, 그래픽을 현대화했으며, 보다 ‘직관적인 복잡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여전히 고통은 정제되지 않았다. 그저 더 깔끔하게 포장된 고문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 게임은 하드코어 게이머의 지성과 피로를 동시에 시험하며, 가장 최근에 플레이한 작품이지만, 『Last Epoch』와 가장 많이 비교하게 된다. 『토치라이트』는 『디아블로3』의 쾌감을 단순화해 가볍고 빠른 흐름으로 재구성한 느낌이다. 세계는 무해하고, 색감은 따뜻하며, 시스템은 간단하지만 나름의 개성이 있다. 실패도, 빌드도, 그저 ‘재미있는 실험’처럼 여겨진다. 죽어도 별일 없고, 다시 키워도 부담 없다. ARPG 장르의 캐주얼한 반사실주의 버전.
그리고 마지막으로 『Last Epoch』.
이 게임은 『PoE』처럼 악의적으로 과잉되지 않았고, 『디아블로』 시리즈처럼 억지 감정을 유도하지도 않는다. 『디아블로2』의 고전성과 『PoE』의 시스템 과잉 사이 어딘가에서, 『Last Epoch』는 비교적 선형적이고 친절한 방식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도, 빌드의 깊이와 창의성을 유의미하게 보존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각각의 액티브 스킬이 독립적인 스킬트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단일 스킬 하나만으로도 수십 가지 플레이 스타일이 가능하며, 실험이 반복된다. 물론 오늘도 난 맥스롤을 켜놓고 S 티어 빌드를 기웃거린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매번 조금씩 다르게 키운다. 그리고 그 '조금'이 이 게임의 정체성이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단순히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설계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디자이너로 변모한다.
특히 스킬 단위의 세부 트리, 선형이지만 자율적인 빌드 설계, 과잉되지 않은 시스템, 직관적인 파밍 루프는
이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지속 가능한 오락실 같은 안정감을 제공한다.
ARPG가 너무 복잡해졌거나, 너무 텅 비어 있거나, 너무 캐주얼하거나, 너무 피로했던 경험이 있다면,
『Last Epoch』는 그 사이에서 가장 믿을 만한 게임 중 하나다.
그 점이, 요즘은 꽤 소중하다.
